봉래시집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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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주소
- 소장품식별자
- 1570
- 소장품명
- 봉래시집
- 소장구분명
- 등록
- 소장품수량
- 1
- 국적명
- 한국
- 시대명
- 조선
- 재질상위명
- 지
- 재질하위명
- 기타
- 수집일자
- 20220602
- 수집사유명
- 구입품
- 소장품유형명
- 책자 및 화보
- 특이사항내용
- 금강산의 시인 봉래(蓬萊) 양사언(楊士彦)의 초간(初刊) 문집, 3권(卷)1책(冊)(86장(張), 楊士彦(1517~1584)의 遺集에다가 楊士奇(1531~1586)와 揚士俊(生沒年 미상)의 詩를 附錄한 것이다. 맨 뒤에 책의 구득자와 구득 경위 표구(粧?)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. 이에 따르면, “양 봉래가 만년에 高城의 鑑湖 북쪽 九仙峰 아래에 살았는데 그 유적이 아직 남아있어, 동서로 오가는 사람이 欽歎해 마지않는다. 임진년(1652)에 내가 금강산 삼일포를 방문했는데, 鑑湖 주인 崔文淑이 이 책을 빌려주어 무술년(1658년)에 내가 萬頃縣令이 책을 改裝하였다”라고 하였다. 승정원일기에 의하면, 1658년 만경현령에 임명된 사람은 金汝亮(1603-1683)이며, 성균관 전적 등을 지내고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. 楊士彦은 字가 應聘, 號는 蓬萊와 完邱·滄海 및 海客이요 본관은 淸州. 1546년(明宗 1) 式年文科에 丙科로 합격, 三登縣監, 平昌郡守, 江陵府使, 咸興府尹 등을 역임했다. 淮陽郡守로 있을 때 金剛山에 자주 드나들었고 금강산 萬瀑洞에는 그의 글자 "蓬萊楓嶽元化洞天"을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. 安邊에 있을 때 智陵 화재로 海西에 귀양 갔다가 2년 뒤 풀려 나오는 길에 병사했다. 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安平大君·金絿·韓濩와 함께 朝鮮 전기의 4대 書藝家라 불렸다. 金剛山에 드나들며 쓴 <金剛山遊覽記>가 있다.
- 데이터추출일시
- 2025-04-13 05:11:35